조르주 바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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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르주 바니에는 1888년 몬트리올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캐나다의 군인, 외교관이자 캐나다의 총독이었다. 그는 프랑스 주재 대사를 역임했으며, 캐나다 역사상 최초의 퀘벡 출신 총독으로서 이중 언어 구사 능력을 바탕으로 캐나다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바니에는 1967년 사망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다양한 기념물과 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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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니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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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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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르주-필리아스 바니에르 |
출생 | 1888년 4월 23일 |
출생지 | 퀘벡 주 몬트리올, 캐나다 |
사망 | 1967년 3월 5일 |
사망지 | 온타리오 주 오타와, 캐나다 |
안장지 | 퀘벡 요새 기념 예배당 |
배우자 | 폴린 아처 (1921년 결혼) |
자녀 | 5명 (테레즈 바니에르, 장 바니에르 포함) |
소속 정당 | 캐나다 자유당 |
군 경력 | |
충성 | 캐나다 |
군종 | 캐나다 육군 |
복무 기간 | 1914년–1948년, 1952년-1964년 (명예) |
최종 계급 | 장군 |
지휘 | 로열 22연대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훈장 | distinguished Service Order Military Cross & Bar Mention in dispatches |
공직 | |
직위 | 캐나다의 총독 |
임기 시작 | 1959년 9월 15일 |
임기 종료 | 1967년 3월 5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리 | 존 디펜베이커 레스터 B. 피어슨 |
이전 총독 | 빈센트 매시 |
다음 총독 | 롤랜드 미치너 |
서훈 | |
경칭 | 소장 각하 |
서훈 |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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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및 교육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바니에는 캐나다 육군에 입대하여 프랑스계 캐나다인으로 구성된 캐나다 원정군 제22대대(후에 로열 22e 연대) 조직을 돕고 장교로 임명되었다.[8] 1916년 참호 습격 성공으로 군사 십자 훈장을 받았으며,[9] 1918년 셰리시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어 오른쪽 다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용맹함으로 군사 십자 훈장에 메달 바와 우수 서비스 훈장을 받았다.[11][12][13]
조르주 바니에는 1888년 몬트리올의 리틀 버건디에서 아일랜드인 어머니 마가렛 (말로니)과 프랑스인 아버지 필리아스 바니에 사이에서 태어났다.[2][3] 부모는 그를 이중 언어 구사자로 키웠다. 바니에는 1670년경 퀘벡 시티로 이주하여 1672년 파리 출신 '왕의 딸'(fille du roi)인 마그들렌 바일리와 결혼한 옹플뢰르 출신 기욤 바니에의 후손이다. 바니에 가족은 처음에는 퀘벡 시티에 거주하다가 18세기에 뉴프랑스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인 몬트리올로 세인트로렌스 강을 따라 이주했다. 바니에의 외조부모는 더 나은 삶을 찾아 몬트리올에 도착한 아일랜드 이민자 존 말로니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피츠기번)였다. 바니에의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였으며 몬트리올에서 최초로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운전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대신 운전 기사를 고용했다. 바니에의 아버지는 멤프레마고그 호수와 세인트로렌스 강에 각각 별장을 소유할 정도로 부유했다.
그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로욜라 칼리지('콜레주 클라시크')에 다녔고, 1906년에 교회 경건 친교 분야의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4][5] 로욜라에서 바니에는 '콜레주 클라시크'에서 전형적으로 가르치는 가톨릭 신학, 라틴어, 그리스어, 철학, 고전, 문학, 수학에 대한 강한 강조를 받았지만, 교육이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진행되었다. 바니에는 학문적으로나 권투, 특히 하키와 같은 스포츠에서도 뛰어난 학생이었다.
로욜라에서 그는 문학 영웅인 존 키츠와 퍼시 비시 셸리에게 영감을 받아 시인이 되려는 야망을 품었다. 조르주 레이먼드라는 필명으로 토론토의 '더 시멘스 매거진'에 여러 편의 영어 시를 발표했다. 바니에는 나중에 자신의 시적 노력에 대해 다소 당황스러웠다고 인정했지만, 그의 가장 좋아하는 영어 시인은 평생 동안 키츠와 셸리였다. 그는 학생 시절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으며 그의 열정은 하키에 쏟아졌고, 나중에 로욜라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경기 종료 1분 전에 학교 하키 팀의 승리 골을 넣었을 때라고 회상했다. 로욜라에서 바니에에게 가장 중요한 지적 영향력을 준 인물은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프랑스 예수회 신부 피에르 고메였다. 고메 신부의 영감을 받은 바니에는 몬트리올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 가정교사 카미유 마틴을 고용하여 프랑스 문학과 문화 전반을 소개받았다. 마틴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프랑스를 떠나 몬트리올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고위 부르주아'를 위해 맥케이 거리에 있는 그의 집, 일명 "은둔지"에서 개인 교습을 운영하는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마틴은 영감을 주는 교사였고, 십 대였던 바니에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엄청났다"고 묘사되었다. 1906년 바니에는 로욜라를 졸업할 때 반 대표였다.
1908년 바니에와 계속 서신을 주고받던 고메 신부는 그의 내성적인 성격을 비판했고, 바니에는 "기쁨, 슬픔, 욕망과 같은 친밀한 감정은 글을 쓰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말로 표현될 수 있으며, 사실 몸짓, 표정, 목소리 톤으로 더 자주 이해됩니다."라고 답했다. 또 다른 편지에서 고메 신부는 바니에가 몰리에르를 좋아하는 것을 비판하며 몰리에르가 가톨릭 교회에 대해 "끔찍한 일"을 썼으며 그의 작품은 검열된 버전으로만 읽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바니에의 여러 예수회 교사들은 그에게 사제가 될 것을 제안했지만, 몰리에르와 같은 작가로부터 그를 멀리하려 했던 고메 신부와 같은 교사들의 완고한 세계관은 그가 사제가 되는 것을 막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08년 5월 바니에는 고메 신부에게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사제가 될 소명이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편지를 썼다.
바니에는 1911년 라발 대학교 몬트리올 캠퍼스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4] 바니에는 그 해에 퀘벡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고,[6] 변호사로 활동했지만,[7] 가톨릭 사제가 되는 것을 고려했다. 로욜라 칼리지에서 영어로 교육을 받았지만 바니에는 평생 동안 프랑스 문학과 시에 대한 강렬한 사랑을 간직했다. 그의 세대 많은 다른 중산층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그의 이상이었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는 파리였다. 바니에는 몬트리올을 파리의 화려함이 부족한 다소 지방적인 도시로 여겼고, 젊은 시절 그는 프랑스 문학의 기준을 높이려고 노력한 지식인 집단인 '몽트리올 문학 학교'의 일원이었다. 1912년 1월 바니에는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하여 여러 문학 살롱에 참석하여 프랑스 시의 최신 작품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3. 군 경력
전쟁 이후, 바니에는 바이미 자작과 윌링던 후작의 부관으로 활동했으며, 라 시타델에서 로열 22e 연대를 지휘하기도 했다.[8]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캐벌리 참모대학에서 수학했다.[15]
1928년, 바니에는 국제 연맹에 파견된 캐나다 군축 대표단에 임명되었고, 1930년에는 런던 주재 캐나다 고등 판무관의 비서로 임명되어 거의 10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18] 1939년 1월에는 프랑스 주재 특명 전권 대사로 승진했다.[18]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바니에는 비시 프랑스의 나치 독일 점령에 따라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1941년 캐나다로 돌아와 퀘벡 군사 구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육군에서 초기 이중 언어 사용 정책을 시작했다.[8] 소장으로 진급한 후,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등의 망명 정부 주재 캐나다 특명 전권 대사 및 자유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 국민 협의회의 캐나다 정부 대표로 임명되었다.[18]
전쟁 중, 바니에는 난민 수용을 위해 캐나다에 압력을 가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무관심과 분노로 이어졌다.[7] 그는 샤를 드골의 친구이자 존경하는 사람이었으며,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드골의 대의를 옹호했다.
1944년 비시 프랑스가 연합군에게 함락된 후, 바니에는 캐나다 최초의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18] 국제 연합의 캐나다 대표이기도 했던 그는[8] 1945년 4월에 해방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를 방문하여 참상을 목격했다.
다음은 바니에의 군 경력을 요약한 표이다.기간 계급 비고 1914–1915 사병 1914 소위[26] 1915–1916 임시 대위[27] 1916–1918 참모 소령[28] 1918–1920 임시 소령[29] 1920–1924 소령[30] 1924–1942 중령 1942–1964 소장 1964-1967 대장[31]
3.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조르주 바니에는 조국에 헌신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캐나다 육군에 입대했다. 당시 대영 제국의 일원이었던 캐나다는 자동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8] 바니에는 프랑스계 캐나다인으로 구성된 캐나다 원정군 제22대대(후에 로열 22e 연대) 창설을 도왔고, 1915년에 이 부대의 장교로 임명되었다.[8]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전쟁에 미온적이었지만, 바니에는 프랑스를 서구 문명의 중심지로 여겼고, 독일의 침공을 격퇴하는 데 프랑스를 돕고자 했다.Coady|2011|p=19영어 그는 중립국 벨기에에 대한 독일의 침공에 분개했으며, 벨기에 민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를 매우 잔혹한 행위로 간주했다.Coady|2011|p=19영어
1916년, 바니에는 참호 습격을 지휘하여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로로 그는 군사 십자 훈장을 받았다.[9] 같은 해, 그는 독일 포탄 폭발로 부상을 입었으나 회복 후 전선으로 복귀했다.Coady|2011|p=29영어 1917년에는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기사(슈발리에)로 임명되었다.[10]
1918년, 셰리시 전투에서 공격을 이끌던 바니에는 가슴과 두 다리에 총상을 입고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1][5] 그는 이 작전에서의 용맹함으로 군사 십자 훈장에 메달 바가 수여되었고, 우수 서비스 훈장을 받았다.[11][12][13]
회복 기간이 길었지만, 바니에는 프랑스에 남아 동료 병사들을 격려했다. 그는 전쟁을 "성전"이자 폭정으로부터 자유를 수호하는 "성스러운 전쟁"으로 보았으며, 자신을 포함한 캐나다 군인들을 "기사"로 여겼다.Coady|2011|p=30영어
3. 2. 전간기 군 복무
1921년부터 4년 동안 바니에는 바이미 자작의 부관으로 활동했다.[8] 중령으로 진급한 후, 라 시타델에서 로열 22e 연대를 지휘하면서 부관 직책을 떠났다.[8] 바니에는 이 직책을 1년 동안만 맡았고, 바이미 자작의 후임 총독인 윌링던 후작의 부관이 되었다.[8] 바니에는 1916~1917년에 캐나다 군단을 지휘했던 바이미 자작과 매우 가까웠다.[8] 1926년 킹-바이밍 사건 동안 바니에는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이 바이미 자작이 하원을 해산하고 매켄지 킹이 요청한 대로 새로운 선거를 치르지 않은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느꼈다. 1923년부터 1924년까지 캐벌리 참모대학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나중에 참모 총장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1 캐나다군 사령관이 된 해리 크레러가 동료 학생이었고 J. F. C. 풀러가 강사였다.[15]
4. 외교 경력
1928년, 바니에는 국제 연맹의 캐나다 군축 대표단에 임명되었고, 1930년에는 런던 주재 캐나다 고등 판무관 비서로 임명되었다. 1939년에는 프랑스 주재 특명 전권 대사로 승진하였다.[18]
4. 1.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동
1939년 1월, 바니에는 프랑스 주재 특명 전권 대사로 승진했다.[18]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바니에는 가짜 전쟁에 놀랐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바니에는 공세가 중단될 것으로 예상했다. 1940년 6월 10일, 프랑스 정부가 투르로 이전한다는 발표에 따라 바니에는 공관 직원들에게 파리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는 공관 정문에 "모든 캐나다 정부 서비스가 파리에서 철수했습니다"라는 포스터를 붙인 후, 공관을 이전하기로 한 페르네로 이동했다.1940년 비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자 바니에와 그의 아내는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1941년 캐나다로 돌아왔다.[8] 이후 소장으로 진급한 바니에는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 주재 캐나다 특명 전권 대사 및 자유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 국민 협의회의 캐나다 정부 대표로 임명되었다.[18]
바니에는 샤를 드골의 친구이자 존경하는 인물이었으며,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드골의 대의를 옹호했다. 조르주와 폴린 바니에는 전쟁 중 난민 수용을 위해 캐나다에 압력을 가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주로 무관심과 분노로 이어졌고, 바니에가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총리에게 보낸 편지는 캐나다 이민 정책 변화를 유도하는 데 실패했다.[7] 1940년 5월 24일, 바니에는 매켄지 킹에게 "캐나다가 난민에게 재정적 지원과 망명을 제공함으로써 조치를 취할 훌륭한 기회가 있다"고 썼으나, 그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4년 비시 프랑스가 연합군에 함락된 후, 바니에는 캐나다 최초의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18]
5. 캐나다 총독
조르주 바니에의 총독 임명은 1959년 8월 1일, 노바스코샤 핼리팩스에서 열린 캐나다 여왕 자문 위원회 회의에서 발표되었다. 이 회의에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직접 참석하여,[1] 국새와 왕실 서명을 통해 바니에를 여왕의 대리인으로 임명하는 것을 승인했다. 바니에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캐나다의 정치적 불안도 있었지만, "만약 신이 제게 이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은 제게 그 일을 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총독직을 수락했다.[8]
바니에는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총리 시절부터 부총독 후보로 거론되었고, 레스터 B. 피어슨 총리도 빈센트 매시의 후임으로 바니에를 고려했었다. 그러나 자유당이 1957년 캐나다 연방 선거와 1958년 캐나다 연방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캐나다 진보 보수당 대표인 존 디펜베이커가 총리가 되었기에, 바니에가 총독이 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19] 바니에는 열렬한 자유당 지지자였기 때문에 그의 임명 발표는 오타와 내부 관계자들과 언론을 놀라게 했다.[19] 하지만 디펜베이커는 캐나다 정부에 더 많은 프랑스계 대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비영어계 캐나다인을 이 직책에 고려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바니에와의 우연한 만남이 임명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고 썼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인 바니에의 임명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당시 여왕의 개인 비서였던 앨런 라셀스는 바니에가 "캐나다 역사상 최고의 총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20]
1959년 9월 15일, 바니에는 존 디펜베이커 총리 앞에서 상원 회의장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의식 동안, 전 달에 여왕의 공식 방문 동안 바니에의 임명을 위해 서명된 여왕의 위임장이 회의장에서 낭독되었다. 그는 절차에 따라 제1 대대, 캐나다 근위대와 왕립 캐나다 병기대 밴드에 의해 왕실 경례를 받았다.[21] 바니에는 "우리 작은 여왕"이라고 부르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맹렬히 보호했고, 봉사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겼다. 그는 이전에 조지 6세(여왕의 아버지)와 조지 5세(여왕의 할아버지)를 섬겼고, 스스로를 자신의 인생 동안 얻은 모든 전문 지식을 군주에게 제공해야 하는 늙은 "기사"로 여겼다. 바니에는 월터 배제호트가 쓴 1867년 저서 ''영국 헌법''을 총독의 권한에 대한 지침으로 삼았다.
5. 1. 총독 재임 기간의 주요 활동
리도 홀에 거주하게 된 후, 바니에는 왕실 및 부왕실 거주지의 정문에 이중 언어 표지판을 설치하고, 건물 어딘가에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예배당을 건설해 줄 것을 요청했다.[1] 이는 바니에의 삶에서 지배적인 두 힘인 종교와 캐나다의 단결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리도 홀 2층에 설치된 예배당에서 매일 두 번 기도했다.[1] 당시 캐나다 연방이 퀘벡 분리주의 파벌들로부터 위협받던 시기였기에, 바니에는 프랑스어와 영어로 수많은 연설을 하며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캐나다인의 공존을 강조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연설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단결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자신의 나라에 대한 사랑과 미래에 대한 믿음은 우리 삶에 새로운 방향과 목적을 부여하고, 국내의 싸움을 넘어 우리를 들어올리고, 공동의 선을 위해 우리를 헌신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위대한 나라가 조각나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습니다."[8] 그러나 이러한 발언은 퀘벡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샀고, 1964년 생장 바티스트 데이에 몬트리올에서 "''바니에 반두''"(바니에 배신자) 또는 "''바니에 푸 드 라 렌''"(바니에 여왕의 광대)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든 사람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22]바니에는 건강 악화(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다[23])와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캐나다 전역을 여행하며 캐나다인들의 애정을 얻었다. 1959년 6월 26일에는 여왕과 함께 세인트로렌스 수로 개통식에 참석했고, 1965년 6월에는 블랙풋 부족의 캘거리에서 대족장이 되었다. 그는 보이스카우트 협회 캐나다 지부의 캐나다 수석 스카우트로서 아이들이 목표를 달성하도록 장려했다. 또한 가족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1964년에 캐나다 가족 회의를 설립했고, 이는 후에 바니에 가족 연구소가 되었다. 국가 원수의 대표로서 미국 대통령 존 케네디와 재클린 케네디,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데이비드 벤구리온, 이란의 샤,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 등 여러 공식 손님을 맞이했다.[8]
총독 임기 동안 바니에는 자신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여러 상을 제정했다. 그는 열렬한 스포츠 팬이었고, 특히 아이스하키와 몬트리올 카나디앵스를 좋아했다. 1965년 총독 펜싱 상과 바니에 컵을 캐나다 대학 스포츠 연합(Canadian Intercollegiate Athletic Union)의 대학 풋볼 챔피언십을 위해 제정했다. 또한 1962년 캐나다 공공행정 연구소의 바니에 메달을 제정했고, 1967년에는 캐나다 주니어 상공회의소의 뛰어난 젊은 캐나다인에게 수여하는 바니에 상을 제정했다.
5. 2. 퀘벡 분리주의 운동과의 관계
존 디펜베이커 총리 시기, 캐나다 연방이 퀘벡 분리주의 파벌들로부터 위협받던 때, 바니에는 프랑스어와 영어로 수많은 연설을 했고, 영어를 사용하는 캐나다인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캐나다인이 공존하는 것을 칭찬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연설 중 하나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결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자신의 나라에 대한 사랑과 미래에 대한 믿음은 우리 삶에 새로운 방향과 목적을 부여하고, 국내의 싸움을 넘어 우리를 들어올리고, 공동의 선을 위해 우리를 헌신하게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모두 손을 잡고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이 위대한 나라가 조각나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습니다."[8] 그러나 이와 같은 발언은 바니에에게 퀘벡 민족주의자들의 분노를 샀고, 1964년 생장 바티스트 데이에 몬트리올에서 "''바니에 반두''"(바니에 배신자) 또는 "''바니에 푸 드 라 렌''"(바니에 여왕의 광대)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든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을 때 증명되었다.[22]6. 사망과 유산
바니에는 1967년 3월 5일 오타와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7] 1967년 3월 8일 오타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국장이 거행되었고, 이후 퀘벡 시타델의 기념 예배당에 안장되었다.[8]
바니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러 상, 건물, 지명, 학교 등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캐나다 공공행정 연구소의 바니에 메달(1962년 제정), 캐나다 대학 스포츠 연합의 대학 풋볼 챔피언십을 위한 바니에 컵(1965년 제정), 캐나다 주니어 상공회의소의 뛰어난 젊은 캐나다인에게 수여하는 바니에 상(1967년 제정) 등이 있다.[35][36][37][38]
바니에와 그의 아내 폴린 바니에는 많은 캐나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경건함과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가톨릭교회의 성인 후보로 여겨지고 있다.[8] 토론토 대학교의 뉴먼 센터에는 바니에 부부를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있다.[24]
존 케이는 "제레미 킨스먼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조르주 바니에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대인 난민의 캐나다 입국을 위해 싸웠고, 전쟁의 고통 속에서 현대 캐나다 다문화주의를 예고하는 인본주의적 신조를 만들어낸 사람은 부유한 앵글로폰의 숙적인 빈센트 매시가 아니라 조르주 바니에라고 주장한다."라고 언급했다.[25]
바니에의 이름을 딴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종류 | 이름 | 위치 | 비고 |
---|---|---|---|
상 | 40세 미만 캐나다인의 뛰어난 업적에 대한 바니에 상 | ||
상 | 캐나다 행정학 연구소 바니에 메달 | [35] | |
상 | 바니에 컵 | ||
상 | 바니에 캐나다 대학원 장학금 | [36][37][38] | |
건물 | 바니에 홀 | 프린스조지 | |
건물 | 플레이스 바니에 |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밴쿠버 | |
건물 | 플레이스 바니에 | 오타와 | |
건물 | 바니에 홀 | 오타와 대학교, 오타와 | |
건물 | 바니에 파빌리온 | 생장쉬르리슐리외 왕립 육군 사관학교, 생장쉬르리슐리외 |
7. 서훈 및 명예
구분 | 내용 |
---|---|
영국 | |
캐나다 | |
외국 훈장 | |
명예 학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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